Han Manyoung  -   Time Stitching: 시간의 무늬

March 27, 2026 - April 25, 2026

한만영은 1970년대 후반부터 ‘차용(appropriation)’이라는 방법론을 선구적으로 자기화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혀온 작가다. 그는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순수예술과 대중문화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해체하고, 그 균열 사이에서 예술과 일상의 새로운 공존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그의 작업은 사물의 이질적인 배치(Dépaysement), 이미지의 교묘한 조합인 눈속임 기법(Trompe-l'œil), 그리고 일상적 사물을 발견하고 선택하여 재조합(Assemblage)하는 등의 전방위적 창작 기법을 아우르는 실험정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 《Time Stitching: 시간의 무늬》는 1980년부터 지속해온 한만영의 대표 연작 《시간의 복제》를 한자리에 꿰어내는 자리이다. 이 연작은 고대 그리스 조각부터 조선시대 회화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미술사적 유산을 차용한다. 특히 이번 신작들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매개로, 특정 시대의 표상과 동시대적 사물을 병치하여 뒤섞인 시공간의 구조를 도출한다.
작품을 살펴보면 이러한 병치는 직관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喜(희)’를 대변하는 브뢰헐(Pieter Bruegel)의〈농부의 춤(The Peasant Dance)〉(1568)에는 의도적인 무의미함을 내포한 붓자국이 더해지고, ‘怒(노)’에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피카소(Pablo Picasso)의 〈게르니카(Guernica)〉(1937) 파편과 실존적 흔적인 군번줄이 결합되어 있다. 또한 ‘哀(애)’를 상징하는 고대 그리스의 금속 투구와 기마상의 형상 아래에는 현대의 기호인 바코드가 배치되며, ‘樂(락)’에는 193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미키 마우스와 전통적 기우자(騎牛者) 도상, 그리고 악기 부품인 테일피스(Tailpiece)가 부착되어 시공간을 교차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적 소재의 차용 또한 주목할 만하다.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를 몽환적인 붉은 단색조로 변주하고, 그 하단을 실제 색연필로 마감하는 방식은 재현된 이미지와 물리적 실재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이처럼 안견, 이정, 문청 등 한국 미술사의 레퍼런스들은 작가의 화면 안에서 해체되고 재구성되며 비결정적인 ‘시공간의 무늬’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익숙한 고전 명화와 색연필, 붓자국, 애플 로고와 같은 현대적 기호들을 병치하는 것일까? 이는 캔버스라는 평면 위에서 시공간의 불연속성을 의도적으로 노출하기 위함이다. 미술사 속의 명화는 작가에게 시공간적 관계를 설정하는 ‘이정표’가 되며,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본 과거의 단면들은 재맥락화가 가능한 예술적 재료로 변모한다. 작가는 이 파편화된 재료들을 한 땀 한 땀 이어 나가며 독자적인 시공간을 직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논의되는 시공간의 개념과 깊게 맞닿아 있다. 모더니즘이 선형적이고 진보적인 시간관을 중시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의 진보라는 거대 서사를 거부하고 파편화된 시간의 공존을 긍정한다. 한만영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Gleichzeitigkeit des Ungleichzeitigen)’은 서로 다른 시대의 사회문화적 요소들이 단일한 화면에 중첩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는 물리적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와 무,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혼종성의 예술로 발현되는 것이다.
한만영은 1980-90년대 한국 화단의 주류였던 단색화의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리얼리즘이라는 이항 대립의 구도 속에서도 어느 한쪽에 매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후기 자본주의의 징후인 대중문화 요소를 적극 도입함으로써 순수미술과 키치의 경계를 허물고 미술의 미학적·사회적 기능을 탐구했다. 결국 그의 작업은 단순히 과거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차용을 통해 독창성(Originality)을 재정의하고 동시대적 예술의 존재 방식을 증명하는 치열한 기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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